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드 제플린/역사 (문단 편집) === 1977년 2월 – 1980년 12월 : 마지막 앨범의 발매 === 1976년 레드 제플린은 난데없이 [[펑크 록]] 밴드들의 난타를 받고 있었다. >롤링 스톤스, 더 후,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이런 밴드들은 우리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백만장자 록밴드들은 이제 자기 사랑 얘기나 세금 불평만 하고 있을 뿐이다. 실업자들에게 러브 송 따위는 필요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부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레코드 시장에 반항할 것이다. >---- >[[존 라이든]][* 다만 후에 본인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Physical Graffiti]]를 꼽았으며, [[Kashmir(노래)|Kashmir]]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사실 펑크 록이라는 개념이 튀어 나온 것도 레드 제플린과는 무관하지 않았다. 레드 제플린이 길을 닦아놓은 복잡한 블루스 음악의 연주라는 개념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오버그라운드 음악을 완전히 분리시켜버렸다. 록 음악을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의 어려운 작곡 요소들을 듬뿍 끼얹어가고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더불어 레드 제플린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록 음악을 지향하던 펑크 록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펑크 록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반에 원초적인 로큰롤 사운드로 승부수를 건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의 [[루츠 록]] 음악가들도 등장하면서 당시에는 "레드 제플린은 대단하지만 음악적으로는 한물 갔다"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펑크 록 밴드들은 이제 우리가 그냥 매너리즘에 빠지고 속주 서커스를 울궈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 밴드의 규모는 이제 투어를 얼마나하고 수익 배분은 얼마인지에 대한 문제를 벗어나 있다는 점을 배려했으면 한다"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펑크 록 음악가들과 리스너들의 비판과 더불어 Presence가 매우 적게 팔린 것도 큰 문제였다. 멤버들은 Presnce 부진의 요인이 홍보 부족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새 앨범을 발매하기 앞서 홍보를 목적으로 제11차 미국 투어를 돌기로 결정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7 led.jpg|width=100%]]}}} || ||<#DBC9B7> '''▲ 1977년. 제11차 미국 투어의 일환인 로스앤젤레스 라이브 당시 모습이다.''' || 제11차 미국 투어는 그 어느때보다도 큰 규모였고 1,2,3차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었다. 록 음악의 주도권이 [[핑크 플로이드]]와 [[섹스 피스톨즈]]로 넘어간 1970년대 후반에도 레드 제플린의 위상은 대단했고, 매 공연마다 5만명이 넘는 열광적인 관중들을 동원했다. 게다가 미시간주에서는 총 7만 6천명의 공연 관람객 기록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세웠던 최대 관객수 기록을 또다시 깨버렸다. 동시에 8집 앨범을 위한 세션 기간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미 페이지는 헤로인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저체중으로 인해 기타도 제대로 못쳤다. 로버트 플랜트는 다리 재활이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몸에 문제가 생겨 진통제를 복용하고 무대에 올라섰다. 공연장 관리인과 레드 제플린측이 서로 오해가 생겨 관리인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이 때문에 경찰이 레드 제플린 관계자들이 묵고 있던 호텔 방에 들이닥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음울한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것은 1977년 7월 26일에 터진 사건이었다. 뉴올리언스 공연을 준비하던 로버트 플랜트 앞으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그 전화는 로버트 플랜트의 다섯 살배기 아들 캐락 플랜트가 호흡기 질환을 적절히 치료받지 못해 목숨이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두시간 뒤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로버트 플랜트의 아내는 캐락이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날로 나머지 투어 일정은 취소되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사실상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투어도 망해버렸고, 멤버간 결속도 상당히 약해졌다. [[존 폴 존스]]는 [[피트 타운젠드]],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 [[폴 매카트니]]의 신보에 참가했다. 그리고 [[지미 페이지]]는 극심한 헤로인 중독으로 생사를 오가는 와중이었고 [[존 본햄]]은 끝없는 알코올 중독에, [[로버트 플랜트]]는 아들을 잃은 극심한 슬픔에 잠겼다. 이 때문에 1978년 연초가 되어 언론들은 레드 제플린의 해체 가능성을 점쳤다. 예민해진 지미 페이지가 언론들에게 화를 내며 절대로 팀이 해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일갈하긴 했지만 말이다. 1978년 11월이 되어서야 로버트 플랜트는 밴드에 돌아왔고, 아들의 죽음을 이겨내고 음악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1년간 연기된 8집을 제작하는 과정에 들어갔지만 팀의 결속력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미 페이지]]가 리더로서의 역할을 사실상 방기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플랜트-페이지]] 간의 음악적 교감도 훨씬 적어졌고, 무엇보다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헤로인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8집은 지미 페이지의 작곡 스타일이 상대적으로 덜 묻어나며, 존 폴 존스의 작곡 비중이 매우 커졌다. 또한 [[All My Love(레드 제플린)|All My Love]]처럼 지미 페이지가 작곡에 일절 참여하지 않은 곡도 존재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79년 레드 제플린.jpg|width=100%]]}}} || ||<#DBC9B7> '''▲ 1979년. 네브워스 공연 직후의 모습이다.''' || 그래서 3주간 완성된 8집은 특별한 음악적 요소 없이 당시 유행하던 [[뉴웨이브(음악)|뉴 웨이브]]의 기조를 받아들여, 레드 제플린의 음악중 가장 끈적하고 헤비하지 않은 음반이 된다. 흥행은 Presence보다는 성공했으나 이도 저도 아닌 음악성으로 인해 발매 직후 안좋은 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집 홍보를 위해 유럽 투어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1980년 투어도 기획되었다. 독일 투어 중간에 바나나 23개와 보드카 40잔을 마신 존 본햄이 제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것을 제외하면 투어는 전반적으로 제11차 미국 투어에 비해 흥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